제 목 | 휴식권과 새로운 시대정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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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 2021-08-19 |
내 용 |
정지우 변호사·<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 저자
최근 노동 문제와 관련된 눈길이 가는 법률 개정과 대법원 판례가 있다. 법률 개정과 관련해서는 ‘산업안전보건법’이 개정되어 사업주의 휴게시설 설치가 의무화되었다는 점이다. 대법원 판례와 관련해서는 아파트 경비원들에게 실질적인 휴게시간이 보장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휴게시간을 근로시간으로 보아 각종 수당 등의 지급 의무를 인정했다는 점이다. 나아가 매달 2시간에 해당하는 교육시간에 대해서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없었고 사실상 강제로 교육을 받으며 각종 지시사항을 전달받았으므로 ‘근로시간’으로 보았다.
아파트 경비원의 경우 온전한 자유가 보장되어야 할 점심시간 등에도 초소에 머무르고 있으면, 입주민의 각종 사소한 요구들을 들어주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런데 사실 그 시간은 경비원들의 휴식이 보장되는 시간이므로, 커튼을 내린다든지, 잠을 자며 휴식을 취하거나 카페에 간다든지, 입주민들의 요구 같은 것들을 무시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휴게시간에도 계속 초소 등에서 대기 상태로 있으면서, 각종 요구를 받는 등 ‘불편한 휴식’을 취하는 것은 실질적인 ‘휴식’이 아니므로 ‘근로시간’이라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대법원 판례와 최근 개정된 산업안전보건법은 상당히 맞물리는 측면이 있는 듯하다. 개정된 법률에 의하면, 사업주는 “신체적 피로와 정신적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도록” 휴식시간에 이용할 수 있는 휴게시설을 갖추도록 하는 것이 의무화되었다. 물론 일정 기준 이상의 사업주에 대한 규정이기는 하지만, ‘근로’와 ‘휴식’의 단절에 대해 꽤나 명확한 선을 긋고 있는 것이다. 근로에서 사실상 ‘완전히’ 단절되지 못한 시간은 근로시간이다. 지휘나 감독을 받거나 그것을 전제로 대기만 하더라도 근로시간이다. 인간에게는 보이지 않는 정신적 ‘끈’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대법원은 이에 대해 적어도 휴게시간이라면 그러한 끈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는 표현을 쓰고 있다.
종합해보면, 인간의 ‘휴식’이라는 개념에 대해, 단지 육체적 휴식뿐만 아니라 ‘정신적 단절’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관점이 점점 더 확고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단절감 속에 인간의 존엄과 고유성이 있는 것이다. 인권 혹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은 다름 아닌 ‘단절’ 속에 있다. 물리적 폭력으로부터의 단절, 또 타인이나 권력의 영향, 정신적 지배로부터의 단절 너머에 인간이 쉴 수 있는 시공간이 있다. 그 속에서 인간은 자기를 지켜내며, 스스로를 구축해갈 수 있는 어떤 여백이 드러나는 것이다.
사실, 이런 논의는 헌법에서 ‘휴식권’을 명시할 필요성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한다. 현재는 헌법에 ‘휴식에 대한 권리’는 명시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노동이 중심인 근대 세계에서는 근로와 일이야말로 인간 삶의 핵심이고, 휴식은 노동을 위한 부차적인 충전 시간 정도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사실 인간은 노동 속에서 자기 자신과 인생을 발견해나가기도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혹은 그 이상으로 노동과 단절된 곳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지켜나간다. 휴식은 노동에 부수되는 영역이 아니라, 그 자체로 고유한 인간의 본질적 시간이기도 한 것이다.
달리 말하면, ‘근로 외’의 시간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인격을 형성한다. 우리는 특정한 직업인으로서 ‘자아실현’을 하기도 하지만, 그 바깥의 시간에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자아’가 있다. 인격과 인간 정체성의 본질을 구성하는 취향, 취미, 사랑, 우정, 여행의 경험 같은 것들이 인간의 개성과 고유성을 구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휴식권의 보장이라는 것은 곧 풍부한 인간성을 지켜주겠다는 뜻과도 같다. 사실, ‘휴식’이라는 말도 다소 제한적인 어감이 있다. 그보다는 ‘생활’이나 ‘인격 발현’, ‘삶’의 시간 같은 용어들이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
앞으로 휴식권이 인격과 인권의 한 축이자 본질 중 하나로 점점 더 인정되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노동은 중요한 가치이고 삶의 본질 중 하나이지만, 결코 인간 삶의 전부는 아니다. 오히려 인간 삶은 노동이 포섭하지 못하는 영역에 더 중요한 가치를 두기도 한다. 휴식권이야말로 새로운 시대정신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저출생과 파편화, 각자도생 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그런 가치에 대한 확고한 인정은 사회 전체에도 중요하고 이로울 것이 틀림없다.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opinion/because/1008203.html#csidx310e4878fffdfbea9a60b40a4811816 |